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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같은 삶을 담은 창작뮤지컬 '22년 2개월' 줄거리, 생애, 영화 등

Ticket Bell 2023. 7. 26. 13:31

오늘은 박열과 그의 동반자인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같은 삶을 다룬 창작뮤지컬 <22년 2개월>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살펴볼까요?

조선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

박열(1902-1974) 이미지 출처: wikipedia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1902-1974)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지만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 문경에 돌아온 이후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지만,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18세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습니다.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1921년 첫 사상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여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를 창간하고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를 응징하는 등 항일 운동을 펼쳤습니다.

1922년 박열은 그의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그녀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 학대로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이미지 출처: wikipedia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양육을 거부당하여 출생 신고가 되지 못해 무적자(無籍者)로 살며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일본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 자라다가 1912년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 살고 있는 고모의 집에 맡겨져 자라났습니다. 조선에서 7년간 살았지만 고모와 함께 살았던 가네코의 할머니는 그를 학대를 하였고, 어린 가네코는 학대와 외로움을 혼자 견뎌내야 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을 목격한 후 가네코는 일제의 폭력과 무자비함을 비판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공감하게 됩니다. 1919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문란한 생활을 하던 스님인 외삼촌과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혼자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 배달과 어묵집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이때 사회주의자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하러 온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고 지내게 됩니다.

 

가네코는 박열의 시에 감명을 받아 정우영의 소개로 그와 인연을 맺게 되고, 1922년에는 박열과 동거하면서 사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열과 가네코의 이야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미지 출처: wikipedia

1923년 4월 박열은 흑우회와 별도로 비밀결사인 '불령사'를 조직하여 보다 적극적이며 파괴적인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같은 해 9월 도쿄 일대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제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박열은 연행되어 수감됩니다. 조사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드러났고, 일본 정부와 검찰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천황 또는 국가의 전복을 기도하며 벌이는 대규모 반역 사건)'혐의를 씌워 기소하였습니다.

1926년 3월 일본 정부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서 사형을 선고했으나 10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두 사람은 3월 23일 옥중에서 정식으로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여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습니다.

1926년 7월 23일 옥중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재판에서 그들을 변호하였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를 흑우회 동지들로부터 거두어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운구해 묻히게 하였습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아키다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에 의해 풀려나게 됩니다. 21세의 젊은 나이로 투옥된 박열은 44세의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 발발 사흘 만에 박열은 북으로 납치되었고 이후 1974년 평양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

영화 <박열>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아나키스트>(2000)를 제작하던 이준익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던 중 독립투사 가운데 '박열'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후 야마다 쇼지가 쓴 『가네코 후미코 평전』을 기반으로 아사히 신문, 산케이 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사에서 실제 박열과 후미코가 받았던 재판 관련 기사들을 요청해 가며 자료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박열'에 대해 우리가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다"라고 고백한 이준익 감독은 영화로나마 박열의 삶과 가치관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20년을 공들인 끝에 영화 <박열>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26억 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 <박열>의 주된 배경은 일본 도쿄이지만 로케이션 촬영은 단 한차례도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역의 최희서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서 일본인 역을 맡았던 배우 최희서가 '가네코 후미코'역을 맡아 일본인이었던 그녀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한국어 대사를 모두 히라가나로 바꿔가며 완벽한 발음 연기를 소화해 냈습니다.

조선을 사랑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같은 삶을 담은 창작뮤지컬 <22년 2개월>

이미지 출처: 아떼오드

박열과 가네코가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 뮤지컬 <22년 2개월>은 박열과 가네코의 역사적 실화 위에 극적 상상력을 더했습니다.

 

<22년 2개월>은 뮤지컬 <광염 소나타>의 작가·작곡가이자 음악감독 다미로가 7년간의 기획 과정을 거쳐 개발한 창작 뮤지컬로 제목인 <22년 2개월>은 박열의 복역 기간이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다시 만나게 된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이상과 사랑 이야기가 최고의 배우들과 5인조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을 통해 무대 위에서 구현됩니다.

 

공연 줄거리

1919년, 혼란스러운 조선을 떠나 동경으로 가는 배 안. 쫓기던 박열은 도망치던 중 가네코와 부딪히게 되고 서로의 책이 바뀌게 됩니다. 가네코의 당당함과 매력에 영감을 받은 박열은 시를 써 '조선 청년'에 기고하고, 가네코는 박열의 시에 한눈에 매료됩니다.

무정부주의를 꿈꾸며 일본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하던 박열은 가네코와 함께하는 것이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하며 그녀를 떠나려 하지만, 1923년 찾아온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시민 자경단에 의해 박열과 가네코는 구속되고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계획이 밝혀지게 됩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박열과 가네코의 이야기 <22년 2개월>이었습니다. 뮤지컬 <22년 2개월>는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2023년 8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공연됩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같은 삶을 무대에서 만나보세요!